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31년 화교배척폭동 (문단 편집) === 인천 이후 === 신의주에서는 6일 오후 9시 30분부터 군중 수백 명이 화교 거주지를 습격했고 7일에도 채소밭에 있었던 화교를 습격했다. 오후 11시에는 압록강의 한 섬에서 60여 명의 조선인 군중이 화교 노동자의 가옥을 습격했고 화교 1명을 살해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4 쪽] 7월 4일에는 개성, 대전, 군산, 공주에서, 5일에는 원산에서, 6일에는 재령, 진남포, 사리원, 해주에서, 7일에는 목포, 의주에서, 8일에는 부산에서 화교를 배척하는 테러가 벌어졌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4쪽] 경성에서는 3일 오후 5시 종로 탐동공원 뒷골목에서 권오봉이란 청년이 재만조선 동포에 대한 신문호외를 들고 있었다. 때마침 초홍전이란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 권오봉은 그 사람에게 신문호외를 보여주고 나서 그 사람을 구타했다. 이런 사건은 4일 오전까지 12건이 넘게 일어났다. 서소문정, 관수동 같은 중국인 거리에서도 작은 충돌이 있었으나 크게 번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1931.7.5] 4일 오후 8시경 광희문 신당리에 있었던 등정 농장에서 일하던 중국인 70명과 조선인 약 백 명(대개 노동자)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중국인 가옥들도 파괴되었고 중국인들은 저항을 위해 곤봉과 칼을 들고 나왔다. 이 과정에 한 중국인이 조선인 하나의 머리를 후려쳐서 부상을 입히자 조선인 군중들을 더욱 격분했다. 동대문서장과 그 밑의 동대문 쪽 경찰 근무원 다수와 경찰부응원경관대는 현장으로 달려가서 해산시켰다. 중국인들은 장충상 뒷산을 넘어 피난하였다.[* 동아일보 1931.07.06] 경성에 있는 조선청년총동맹은 재만동포 위해(危害) 문제에 대한 항의문을 중국 국민정부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냈고 총동맹의 세포단체인 청년동맹들에게 재만동포 옹호운동을 적극적으로 일으키도록 지령을 발송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8] 강원도 영월에서는 좌경 청년들이 도처마다 선전활동을 하고 화교를 배척하는 폭동을 벌였다. 해당 지역 경찰서에서는 주야로 진압하고 화교를 보호했다. 원주에서는 7월 20일 조선청년단이 화교를 무력을 써서 쫒아내는 일이 일어났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8] 조치원에서도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는데 경찰에서 조치하여 청년 20여명을 체포했다. 춘천에서는 7월 6일 농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해서 중국인 떡집과 잡화점을 테러했다. 같은 날 양주에서는 회천면 덕정시장에서 중국 요리점에 테러를 벌이고 중국인을 구타했다. 덕정주재소 순경은 봉양리 청년 15명을 검거했다. 사리원에서 5일 저녁 10시 경 청년 노동자 수백여명이 곤봉과 돌맹이를 들고 모여들어서 중국인이 경영하던 요리점 동승루를 포위하고 전선을 절단해서 전화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후 가게를 습격하고 가구를 파괴했고 역시 같은 방법으로 3-4곳의 요리집과 10여 곳의 포목상, 야채상을 습격해서 테러를 벌였다. 이리의 지경(地境)에서도 5일 밤 9시경 청년 수십명이 모여서 중국인 빵집을 테러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9] 평남 안주에서는 4일 오후 4시 매일신보 지국에서 임시 의장 이선욱이 사회를 보면서 장춘현 삼성보 동포구축 문제에 대한 시위 행렬에 관련된 구체안을 결의했다. 그리고 6일 밤 안주에서는 읍내 중국 상점을 습격하여 유리창과 간판을 파괴하는 테러가 벌어졌다가 경계하던 경관이 제지하자 해산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7] 경성에서는 인천, 평양보다는 빨리 대처했다. 7월 4일 새벽부터 배화폭동이 일어나자마자 군중들은 왕십리 방면으로 몰려갔다. 하왕십리 소재 화교 15명이 연화공장에 피난 와 있던 상태였는데 그곳을 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순사는 이미 그곳에 잠복해 있었다. 6일 서대문경찰서에서는 서소문통과 태평통을, 수표정파출소에서는 관수동을 일대를 중심으로 시내에 흩어져있는 화교 상점에 한 명씩 경관을 철야교대하며 경계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4쪽] 1931년 화교배척폭동 당시 일본 경찰이 사전에 준비하고 질서를 유지한 곳에서는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규모가 작았다. 예로 남쪽 지역은 1927년 화교배척 테러가 격렬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경찰은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초기에 진압하여 큰 충돌이 없도록 했다. 대전 같은 충남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일본 경찰이 질서를 유지하고 중국상인도 미리 대책을 강구해서 대체로 평정을 이어갔다. 충남 선장(仙掌)은 조선인과 화교 사이에 친선의 정이 두터워 더욱 평온했다. 전북 고창도 1927년에는 격렬한 테러와 폭동이 일어났던 곳인데 1931년에는 경찰서장이 특별히 보호해서 별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수의 북부지방은 시위와 화교에 대한 테러가 징후가 있었는데도 경찰은 대응이 미숙했고 질질 끌었다. 북부지방에서 드문 경우는 평북 후창(厚昌)인데 화교가 1,500명 있었으나 경찰서장이 명령을 내려 실탄을 장전하여 화교를 보호하자 역시 별 일은 없었다. 경찰 뿐만 아니라 지역 청년단체 같은 사회단체가 사태를 진정시키거나 화교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하기도 했다. 밀양에서는 청년동맹 같은 기타 사회단체와 중국인 대표가 서로 양쪽 민족을 보호하기로 합의하였다. 마산에서도 한중간에 일이 터지기 전에 마산 노동연맹에서 방지책을 위해 방지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53] 일제 치안당국은 화교의 피해가 대규모로 커진 뒤에야 본격적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인천에서는 배화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5일 오전 1경에서 경성에서 파견된 경관대가 도착해서 사건 관련자 40여명을 체포했다. 경성에서는 화교배척 문제로 체포된 조선인이 7월 5일까지 300여 명이었다. 평양에서는 사건 발생 이틀 뒤 6일부터가 되어서야 무장경찰이 투입됐다. 평양 경찰서의 경찰과 헌병 70명, 소방대원 약 200명을 동원했고 조선인 57명을 체포했다. 7일까지 체포된 사람은 28명이었다. 11일에는 평양경찰서 경관 300명이 호별로 수사하면서 사건 관련자를 체포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4 쪽] 13일까지 전국적으로 체포된 인원은 1,840여명에 달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5쪽] 하지만 이미 평양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